ART/maester

나의 스승이자 '야샤 하이페츠'의 제자이신 김영근 교수님의 글

010 5274 7553 2012. 10. 26. 20:58

 

 

Jascha Heifetz

 

 

 

 

 

내가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고,
이틀을 안 하면 비평가가 알고,
삼 일을 안 하면 청중이 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제자 prof.자크하 브론...

레오니드 코간의 수제자 prof.나나 야쉬빌리...

야샤 하이페츠의 제자 김영근교수...

 

이 엄청난 거장들이 나의 스승입니다.

그들의 정신과 음악을 전수받은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하였다 고백하며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부족한 나를 찬양의 도구로 기르시기 위해 가장 좋은것으로 인도하심이 정말 큰 축복이라 생각하며 나의 평생이 주님께 드려지길 기도합니다 .

 

위에 언급한 바이올린의 거장들의 계보에 바이올리니스트 정원영도 서있다 생각합니다.

그 중 나의 선생님 김영근 교수님의 글을 통해 야샤 하이페츠를 만나볼까요?

 

 

 

큰 은인이었던 나의 스승 야샤 하이페츠


                                     글. 김 영 근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있어 별이요 꿈같은 존재인 야샤 하이페츠!
과연 한국의 시골 촌놈이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야샤 하이페츠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할 가능성이 있을까? 더구나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해봐도 하늘의 별따기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경남 진해, 군인들의 도시에서 초등학교을 다니기 시작할 때 나의 아버지는
작은 바이올린을 사가지고 와서 나의 턱에 걸쳐주셨다.
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전가시키고 싶어 시작한 것이지만 당시
진해에는 바이올린 선생이 한 명도 없었고, 바이올린을 하는 학생은 내가 처음이었다. 진해는 시골이었고, 나는 촌놈이었다.
선생을 찾아 부산으로 레슨을 받으러 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지방 콩쿠르에서의 입상경력에 힘입어 6학년 때 서울의 이화, 경향콩쿠르에
나갔으나 1차에서 떨어졌다. 그 쓴맛 덕에 예원중학교가 생길 것이라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다음 해에 예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서울에서의 하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재현선생님의 지도덕분으로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의 바이올린 독주자로 입단하게 되었는데 선명회에서의 합숙생활과 해외연주여행은 나에게 즐거움과 꿈을 주었고 연주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서울예고 당시 나는 오래된 라이프 사진 잡지표지의 하이페츠 연주사진을 보고 그것을 오렸다. 그 사진을 액자에 넣어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면서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하이페츠도 가르칠까.... 그의 제자가 되어 배울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은 하나님이 듣고 이루어주시기 이전에는 전혀 실현불가능한 망상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명회합창단과 함께 미국과 캐나다 순회공연을 갔을 때 미국인의 주선으로 하이페츠 앞에서 오디션을 갖게되는 믿지못할 일이 생겼다.

하이페츠는 피아티고르스키와 함께 로스엔젤레스의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소규모의 마스터 클래스를 갖고 있었다. 70세를 넘긴 거장 하이페츠 앞에서 몇 곡을 연주한 나는 스스로 너무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고 하이페츠와 악수하고 그 앞에서 연주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흡족한 입장이었는데 놀랍게도 자신의 5명의 제자 중 하나로 택하겠다고 나를 지목했던 것이다.

1901년 러시아의 빌나에서 출생한 하이페츠는 세살 반 무렵부터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 루빔 하이페츠에게서 바이올린의 기초을 배웠다.
1910년 성페테르브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당대의 무수한 명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낸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 아래서 체계적인 바이올린 수업을 받으면서 기량을 쌓아 나갔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정치체제의 변화로 하이페츠와 그 가족은 러시아를 떠나게 되었다.(후에 하이페츠는 나와 단 둘이 방에 있을 때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유태인으로서 추방당할 때 한국을 거쳐 나왔다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하이페츠의 음악세계는 더욱 넓고 깊어져 20대에 이미 "바이올린의 황제"위치에 올랐고 또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는 "바이올린의 전설"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는 1962년부터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해 오고 있었는데 바로 그 기간에 정말 믿기지 않게도 내가 그의 앞에서 오디션을 갖게 되고 또 제자로 초대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당시 18세였던 나는 병역 미필자로서 해외유학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한국법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도 고 육영수여사가 나서서 도와줌으로써 특별허가를 받아 결국은 하이페츠의 제자가 되는 일이 실현되었다.

하이페츠와 함께 보내며 배우는 시간은 일주일에 두번씩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다. 다섯명의 정규 제자들이 항상 함께 하였고 나머지 시간에는 조교수인 유태인 여자선생님이 우리를 준비시켜 주었다. 철저한 스케일연습이 요구되었고 에튜드와 파가니니 카프리스, 무반주 바흐 소나타, 소품들과 협주곡 그리고 실내악등 전반적인 훈련이 주어졌다. 제자들을 위해 정규 피아니스트가 고용되어 있었고 늘 우리의 반주를 맡아 주었다.

하이페츠는 또한 우리가 대학 교수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마련하였고 우리만을 위한 대학교수의 음악이론 수업이 매주 있었다.

그 외에도 외국인 학생 몇 명을 위한 사무적인 처리를 돕도록 개인 비서를 두고 있었다. 이렇게 빈틈없이 자신의 제자들을 보살피는 하이페츠의 지도에 나는 감사와 최대의 존중심으로 배우고자 열심히 노력하였다. 제자들에 대한 관심은 클래스의 레슨시간 이외에도 계속되었다. 특정한 공휴일에는 선생님의 해변가 별장인 발리부 비치에 우리를 불러 함께 먹고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종종 즐기는 게임은 탁구치는 일이었다.

한번은 나와 하이페츠가 한편이 되어 탁구게임을 하다가 실수로 내가 선생님의 그 귀한 오른손을 탁구채로 쳤다. 선생님은 멈추고 서서 손을 입으로 불면서 몹시 아픈척 하는 시늉을 하였고 주변사람들은 웃었다. 그러한 가벼운 분위기 중에도 내 마음은 그 분에 대한 극도의 경외감이 끝끝내 없어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진 한번 같이 찍자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아쉽지만 그것은 나 때문이었다.

하이페츠는 미국에서도 자유분방한 L.A에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정통적인 예의와 가치관을 심어주려고 하였다.
클래스때마다 우리는 넥타이를 포함한 정장을 하였고 선생님을 항상 '미스터 하이페츠'라고 불렀다. 선생님 스스로도 또한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존중심을 갖고 있었다. 그 예로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사망한 소식을 들었을 때 선생님은 자신과 함께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묵념을 하도록 하였다.

한 번은 나단 밀슈타인이 L.A.에  협연차 왔었는데 그의 공연 직후의 레슨자리에서 각 학생에게 그 연주회에 갔었는지를 물었다. 가지 않은 학생에게는
그 이유를 묻고 합당치 않다고 간주되었을 때 내는 벌금을 내도록 하였다.

하이페츠만큼 녹음한 곡이 많은 연주가가 없었는데 그런 그가 취입하지않은
곡들이 있었다. 그것은 크라이슬러 곡들이다. 그 이유 역시 하이페츠가 가진
크라이슬러에 대한 존중심때문이었다. 크라이슬러 자신이 연주한 음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그는 원칙에 따라 사는 개성있는 사람이었고 시간의 낭비를 싫어하는
절제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의 연주모습에도 반영되어 필요없는 표정과 몸의 움직임없이 격정적이고도 난해한 곡을 처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겉모습은 차가와 보이지만 그의 연주에는 따뜻함과 사랑, 신중함과 유머감,
슬픔과 기쁨 같은 모든 인간의 느낌이 자유자재로 들어 있다. 뉘앙스가 없는
무미건조한 연주를 그는 싫어하였다.

하이페츠는 종종 자신의 악기를 실습으로 보여주곤 하였는데 바로 눈앞에서
그의 왼손가락의 움직임과 오른손의 활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거기서 창조되는 하이페츠 특유의 소리를 듣는 것은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그 소리를 터득하고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계속 노력하였다. 그 소리는 활을
엄지와 처음 두 손가락으로 힘있게 꽉 잡고 해야 가능한 소리였고 활의 유연성은대부분 팔목으로 하였다.

하이페츠는 평생 바이올린 줄을 양의 창자로 만든 힘줄로 된 줄을 사용하였는데(A선과 D선) 그러한 줄로 깨끗한 소리를 내려면 활을 꽉 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곡을 외워서 연주하는 경우 눈을 감고 하곤 하였는데 선생님은 나에게
눈으로 왼손가락을 쳐다보라고 여러번 지시하였다. 그 단순한 지시가 나의 연주를 향상시키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박자를 셀 때 각마디 숫자로, 예를 들면 "하나, 둘, 셋/하나, 둘, 셋"
이라고 세도록 훈련시킴으로 그것 역시 정확한 연주를 위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레슨 중에는 학생이 활잡는 방식을 묻거나 또는 자세한 핑거링을 묻거나 하면 선생님은 손을 무릎쪽에 대고, 그런 것은 유치원에서나 하는 것이라는
제스처를 쓰곤 하였다.

나에게는 활을 충분히 쓰지 않는 문제가 있었는데 어느날 선생님이 1/4사이즈 활을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연주하게 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활을 조금씩 쓰는 습관을 완전히 고쳤다. 참으로 훌륭한 실물교습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중에 한 번도 고함을 치거나 짜증내는 일이 없었다. 기대에 못미치는 학생은 다음 학기 때 더이상 초대되지 않았다.

내가 선생님께 어떻게 연습해야 되는 지를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유치원에서나 하는 것이라고 하는 대신 시간을 내어 진지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때 알게된 하이페츠의 비밀(?)들은 두고두고 나에게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연습 시스템의 일부분에는 왼손가락으로만 하는 운동이 있고, 화음을 포함한 스케일 연습이 들어있다. 그리고 특이한 점 한 가지는 곡들 중 가장 난해한 부분들을 매일 연습일정에 넣어서 쉬워질때까지 한다는 것이다.

하이페츠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가를 말할 때 악마처럼 했다고 표현
하였다. 그가 세살 반 이후로 얼마나 바이올린을 연주했는가는 그의 길을 걸을 때도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 걸음은 연주 자세 모양이었다. 우리에게체계적인 매일의 연습을 설명하면서도 4시간 이상 하면 너무 많은 것이라고 하였다.

좋은 선생은 적은 수의 말로 가르치는 자라고 하는데 그 면에 있어서도 하이페츠는 훌륭한 선생이었다. 그분에게서 배운 것들은 계속해서 나 스스로 발전시켜갈 수 있는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자신이 없는 부분은 암기였는데 하이페츠는 잠자기 전에 익보를 읽어보라고 조언하였다.

이렇게 4년째 그의 제자로 있으면서 배우는 것은 끝이 없었고, 5년째에도 하이페츠는 나를 데리고 있으려고 하였지만 끝내 한국 병무청에서 허락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제자가 된 지 4년째 되던 해 하이페츠는 나만을 그의 집으로 초대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아무튼 특별한 초대였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눈 후 선생님은 피아노 위에 놓여있는 두 대의 바이올린을 가리키면서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가지라고 하셨다. 나는 오스트리아제 200년 된 바이올린을 선택하였고, 선생님은 자신도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 때까지 나는 변변한 악기가 없어서 어느 유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빌려쓰고 있었다.

나의 마음에는 존경심과 경외감으로 인한 완벽한 거리가 하이페츠와의 사이에 계속 있었지만 그분이 제자에게 기울인 관심은 마치 아버지와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세월이 지난 나는 가정을 이루었고 아들을 포함한 가족사진을 하이페츠에게
보내었는데 어느 날 나의 집으로 전화가 왔다. 하이페츠의 음성이었다. 편지와 사진을 잘 받았고 우리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나는 아내와 함께 하이페츠를 방문하였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다면서도 우리에게는 시간을 내주었다.

그 방문 2개월 후 나는 신문과 라디오, TV뉴스를 통하여 하이페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나에게는 너무나 큰 은인이었으면서도 내가 좀더 충분히 감사와 애정표시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가 사망한 1987년 타임즈에서는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는 그의
기술과 예술을 극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서 하이페츠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고 사랑받지 못했다고 묘사하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얼마나 사실과 먼 내용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이페츠는 순수하고 정치적이지 않으면서 가식이 없는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예술의 세계에 전념하여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까지 이루어 놓음으로 우리 모두의 수준을 높인 위대한 일을 성취하였다.

하이페츠! 그리운 나의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내가 악기를 잡고 연습할 때
나와 함께하며 나를 가르치고 있다.


                                    오래전 음악저널에 실린 기사내용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영근